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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정리하는 2021년 마지막 1시간. 사고팔고(四苦八苦)

Brett 2022. 1. 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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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한 해는 특히나 힘든 일이 많았다. 살면서 처음 겪는 각종 범죄부터 처음 들어본 정신적인 것들. 그렇지만 고통을 생각하면 고통만 증폭된다. 2022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 정의와 도덕의 개념은 도데체 무엇인지. 스스로 정립이 힘들어 각종 단체에 봉사와 testimony를 시작하고, 이제껏 겉핥기식으로만 읽은 구약성경, 신약성경, 토라, 탈무드, 코란, 아함경 등을 다시 읽는 중이다. 물론 다른 도서도 읽어보지만 과연 종교의 시각에선 윤리란 무엇일까. '초월자'의 존재는 과연 우리 안에 있을까, 그리고 그 '초월자'가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정의를 이루어낼까. 생각 속에서만 괴로워하지 않는 2022 임인년을 맞이하기위해 역설적이지만 고통을 바라본다.

Damien Hirst,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1991

 

사고팔고(四苦八苦)

네 가지 괴로움과 여덟 가지 괴로움

인생이란 여정에서 불가피한 온갖 고통을 말한다.


사고는 생(生),노(老), 병(病), 사(死)의 네 가지를 말한다.

잉태(孕胎)하여 태어날 때까지의 생고(生苦)

출생과 사망사이에서 쇠변(衰變)하는 노고(老苦)

질병에서 오는 몸과 마음의 병고(病苦)

그리고 생명이 다할 때의 사고(死苦)이다.

현재 인식하는 시공간속에서 존재하는 생물체로서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이다.

Damien Hirst, Pill Cabinet (part), 2007

 

여기에 인생의 여정 중에 다가오는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는 고통 (애별리고 愛別離苦),
원수를 계속 만나야 하는 고통(원증회고 怨憎會苦),
갈망해도 쟁취할 수 없는 고통 (구불득고 求不得苦),
오음이 치성하는 고통 (오음성고 五陰盛苦)
이 네 가지를 더하여 팔고라고 한다.

 

Hieronymus Bosch,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part), 1490-1500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자와 언젠가는 이별하는 된다는 것이다. 철학자 스피노자도 언급했던 3가지 죽음과 맥락이 같다. 즉, 1인칭인 나의 죽음과 3인칭인 그들의 죽음은 슬프지 않다. 하지만 2인칭, 사랑하는 당신의 죽음은 가슴을 후벼파는 고통을 준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에서 오는 고통이 애별리고이다. 부재를 실재로 바꿀 수는 없다. 이 고통을 감당하는 것은 결국 자기제어능력과 충분한 시간이다.

 

Käthe Kollwitz, Mother with a Child in her Arms, 1916

 

원증회고(怨憎會苦). 우리는 살면서 정적을 만들기도 한다. 두번 다시 만나기 싫은 관계들. 직장상사, 전남편, 전처, 범죄가해자 등. 그러나 대부분은 또 쌍방으로 싸우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어긋난 의사소통이나 불순하다고 여긴 상대방의 행동때문에 상대하기를 꺼리는 것. 항상 밝은 얼굴로 많은 호감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도 언짢은 일로 다투었다해서 마주치면 상대를 의식적으로 피하는 경우도 있다.  우린 무엇보다 자신의 성격을 놓고,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 행동밖에 다른 방법이 없을까. '나를 알아주세요'  혹 '저 사람을 벌하세요' 하는 것보다 겸허한 자세로 주변을 안심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회에서 구성원들과 공존하려는 자세로 자신부터 먼저 품위를 지켜야한다. 안 그러면 본인만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는 꼴.

 

Francisco de Goya, Third of May, 1814


구부득고(求不得苦). 우린 모두 원하는 것이 많다. 그리고 그 것을 다 쟁취할 수 없다. 부자로 넉넉하게 즐기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갖고싶고 출세해서 명예를 얻는 등 인간의 욕망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월급쟁이로 생계를 꾸리며 소박하게 인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항상 더 나은 무엇을 위한 욕심에 불만이 가득하다. 그런 욕망은 쟁취하지 않는 이상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차라리 행동해서 쟁취하는 과정 중 받는 고통이 덜 하지 않을까 싶다. 

 

Sarah Lucas, Eating a Banana, 1990


오음성고(五陰盛苦). (* '오온성고' 라고도 하는데 '음'이나 '온'이나 그 차이는 없다) 8가지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이다. 오음이란 인간의 인식의 구성체계이다 - 쉽게 말하면 눈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싶어하고, 귀는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입은 맛있는 것을 쫒고, 몸은 편리함을 추구하고 마음은 평온하길 원한다. (색음, rupa / 수음, vedana / 상음, samjna / 행음, samskara / 식음, vijnana) 이런 육신의 욕망이 너무 치성해도 괴롭고 또 언젠가 육신이 무너지는 날도 온다. 나와 세상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연결망인데 이는 동시다발적으로 끝없이 세상과 접점을 만들며 번뇌로 이끈다. 계속해서 변하는 정신, 즉 생각이 오음 모든 것을 흔든다. 가끔은 내가 원하는 것이 진정 원했던 것인지. 라캉Lacan이 말한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와 일맥상통한다. 결국 스스로를 전지적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보고 절제하는 인식체계를 갖추는 작업이 오음성고에서 인간을 탈피시켜 줄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게 되는 사람이 과연 몇 이나 될까?

 

Edvard Munch, The Scream, 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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