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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Rijksmuseum Amsterdam (해외생활)

Brett D.H. Lee 2021. 3. 1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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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의 전반적인 지도. 시내 곳곳에 볼거리가 넓지 않은 거리에 다 있어서 실은 산책하면서 하루만에 그 앞은 다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이다. 다각형으로 각이 지는 저 도심의 운하 한개의 변이 약 300~400미터 정도니 이 스케일을 알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지도에서 가장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공원 (Vondelpark와 Watergraafsemeer라고 써있는 쪽에 있는 frankendael) 옆에서 각각 살아보았고, 3번째는 NEMO science museum 근처에 살았다.

 

암스테르담 2014-15년도에 살면서 매일같이 여기저기 다 다녀서 소개하고픈 곳이 정말 많다. 오늘은 저 지도에서 Rijksmuseum이라고 적힌 뮤지엄플라인 museumplein의 3가지 미술관을 잠시 짚으면서 네덜란드 미술의 정수를 잘 정리한 라익스뮤지엄을 우선 만나본다.  (네덜란드는 거주했던 이때 말고도 다른 해에도 두번 방문했었다. 기록이 새록새록)

 

 

스테델릭 미술관 Stedelijk Museum Amsterdam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반고흐미술관 Van Gogh Museum 그리고 라익스 미술관 Rijksmuseum (국립미술관)이 나란히 공원을 중앙에 두고 나열되어 있다. '스테델릭'이 시립이란 뜻이고 '라익스'는 국립이란 단어이다. 그래서 많은 블로그나 한국어 표기에서 그냥 그대로 쓰긴하는데, 그냥 암스테르담 국립/시립미술관으로 써야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스테델릭/라익스 미술관은 다른 도시에도 있으니까... 아마 암스테르담의 것이 유명하니 고유명사처럼 쓰여서 한국어 표기가 그렇게 된 것일 수 있겠다.

 

아침이 밝았다. 암스테르담에서의 첫 번째 집. 동남쪽에 있는 2층짜리 row house 타운하우스 개념의 벽돌집이다. 2번째 집은 운하에서 바라보는 특유의 좁고 높은 5층짜리 집. 올라가며 씩씩댔던 기억이 난다. 3번째 집은 암스테르담 중앙역 동쪽에 다소 최근 "땅이 또 만들어져서" 그 위로 만들어진 주거단지이다. 어쨋든 다 좋았는데 내 평생 기억에 남는 주거형태 중 하나인, 지금은 재개발로 아예 사라진 이 루돌프 디젤스트랏 Rudolf Dieselstraat의 마을이다. 아침마다 각종 커다란 새들과 닭, 가끔은 사슴같은 동물이 이 마당에서 뛰놀았다. 외진 곳, 자연의 일부인 느낌으로 살면서도 다녔던 회사는 물론 도심의 모든 미술관을 자전거로 10분만에 갈 수 있다. 나무 우거진 것 보소... 잡초관리도 해야할텐데.. 가끔 손으로 뽑아줬다.

 

뮤지엄 플라인에 있는 3개의 미술관은 나중에 사진으로 체크해보니 각각 50회는 들락날락 하였다. 그런 나의 앞마당 미술관을 이 한가한 주말아침에 다시 가보려한다. 날이 화창해서 빨래널어놓고 ㅎㅎ 마치 17세기 네덜란드인처럼 살았었다. 

 

간소한 아침식사. 좋아하는 맛으로만 먹는다. 살짝 데워진 토마토, 올리브, 양파/마늘볶음. 그리고 허브로 버무려진 닭가슴살.

 

집앞을 총총총 걸어보는 중. 아름다운 물의 나라 네덜란드!

 

그리고 자전거의 나라 네덜란드. 운하따라서 매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이렇게 눈을 정화하는 뷰를 즐겼다. 왼쪽 나무들 뒤로 국립미술관의 지붕이 뾰족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보니 운하에서 저 보드 한번도 못 타보았네...

 

뮤지엄플라인에 도착하면 일단 이렇게 큰 인공호수가 있다. 그 뒤로 위풍당당히 자리한 국립미술관 Rijksmuseum

 

조금 더 뒤로 가면 이렇게 plein이란 말이 어울릴 넓은 녹지가 나타난다. 이 푸른 잔디밭위에 서면 국립미술관, 반고흐 미술관, 시립미술관, 그리고 왕립극장 Koninklijk Concertgebouw이 다 보인다. 위는 국립미술관 

 

서쪽으론 마치 욕조가 떠있는 듯한 시립미술관, 주로 현대미술을 다루는 스테델릭은 '모던아트 뮤지엄'이다. 이 미술관 건축도 할 말이 참 많다.

 

공원 남쪽 끝에는 왕립극장이 있다. 가끔 주중에 하는 무료 공연 본다고 점심식사를 1시간 반으로 잡고 뛰어가서 공연보고 회사로 돌아갔다. 점심은 물론 이 공원 어딘가에서 핫도그라던지 알버트하인(가장 큰 편의점체인)에서 파는 2유로짜리 샐러드로 때우며 공연을 기다렸다. 이마저도 다 20대의 추억이 되어버린 것. 또 그렇게 시간쪼개서 악착같이 문화생활 해보겠다고 난리칠 여력이 되려나? 다시 상기하고 이 어려운 코로나 시대에도 LA든 NYC든 어디에서든 날은 세우고 살아야겠다.

 

 

그리고 스테델릭 바로 옆에는 반고흐 미술관이 자리한다. 네덜란드를 넘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하나인 반 고흐이기에 관광객이 항상 많다. 미술관카드 museumkaart를 가지고 있어도 항상 10~30분은 줄이 있었다. 없으면 당연히 2시간까지도 줄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줄만 서다가 못 들어가서 화내는 사람도 종종 보았다. 나는 일부러 낮에는 잘 가지 않다가 저녁에 멤버만 들어가는 날이거나 매주 금요일 이벤트 나잇night에만 들어갔다. 물론 처음 이 미술관을 엄마와 함께 갔던 2008년에는 줄 서서 들어갔었다. 그리고 다시 여기에 와서 살면서 현지인들만 가득할 때 가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다. 인생이란...

 

이렇게 뮤지엄 플라인에서만 유럽여행 하면서 2박3일은 꼬박 놀 수 있다. 오늘은 국립미술관을 더 자세히 알아보자.

 

다시 국립미술관 앞으로 돌아왔다. 렘브란트 또한 유명하니 역시나 이런 길거리 퍼포먼스 동상이 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Rijksmuseum Amsterdam은 1978년 11월 19일 헤이그에서 창설되었다. 1808년이 되서야 당시 네덜란드 왕 루이 보나파르트에 의해 암스테르담 왕궁으로 옮겨졌었다가 다시 근처에 있는 트리펜하위스Trippenhuis로 이전했다. 현재의 건물은 Pierre Cuypers가 설계하며 1885년에 개관하였다. 창설 당초의 수장품 수는 200여 점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후 많은 기부와 구매로 현재는 백만점이 넘는 작품 및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그 중 약 8천여개가 테마에 맞추어 전시되고 있다. 물론 루브르나 에르미타쥬, 대영박물관과 비교하면 이 수는 반드시 많다고는 할 수 없으나 질적인 수준으로는 압도적이다. 17세기를 중심으로 한 네덜란드 황금기, 회화의 메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야경>, <유다의 신부> 등을 포함한 21점의 렘브란트 Rembrandt와 <편지를 읽는 여인> 외 3점의 베르메르Vermeer, 프란츠 할스Frans Hals, 얀 스틴Jan Steen 등 대표적인 컬렉션이다. 더욱이 19세기 후반 이후 근대 회화의 대부분은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 이관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250여 점에 이르는 반 고흐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2013년 3억 7천만 유로라는 거액을 들여서 보수공사를 진행하였고 현재 우리가 만나는 미술관의 형태가 완성되었다. 2013년 이전과 이후 다 방문해본 나로서는 내부가 아주 깔끔하고 또한 중간에 뻥 뚫어 썽큰sunken 로비를 만들어낸 것은 아주 좋은 디자인 솔루션이라고 생각한다.

 

터널처럼 쑥~ 통과되는 건물. 정말 터널이다. 양옆으로 보행자, 가운데는 자전거도로이다. 네덜란드는 자동차, 사람, 자전거가 맞닥뜨리면 보통 자전거가 먼저 지나간다. 그리고 이렇게 미술관 한 가운데를 자전거가 관통하며 이 뮤지엄플라인 녹지부분과 터널 반대편의 도심/쇼핑가로 연결시켜 버린다. 미술관이 교통의 교차로에 있는 것이다. 이래야 사람들이 오며가며 자연스럽게 동선이 뮤지엄 내부로 흘러들지 않을까?

 

터널을 통과하면서 보는 풍경이다. 아래로 이런 sunken 플라자가 있다. 반지하이지만 알다시피 유럽의 모든 건물은 중앙이 뻥 뚫려있으니 천창으로 햇빛이 가득히 내려온다. 마치 온실처럼 느껴지며 따뜻하고 포근함마저 느껴진다.

 

중앙에는 눈에 확 띄는 칼더의 작품이 있다.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참조 출연 ㅎㅎ내가 세계 어디든 돌아다니면 그 곳으로 오신다. 오타와, 토론토, 암스테르담 외 여러 유럽국가,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등 그리고 조만간 LA. 물론 돈이 엄청 많거나 그런거 아님. 자칫 독자분들이 오해할까봐... 열심히 일하면서 돌아다니는 것으로 만족하며 행복한 노마드라는 것을 다시 리마인드 한다. 그리고 여행자체가 험난한 일정이거나 위험한 나라(?)에는 혼자인 것이 나은 것 같다.

 

그 뒤로는 장애인용 엘리베이터가 양옆에 있고, 단층을 내어 반지하에서 반층 더 내려가는 부분은 뮤지엄샵, 그 위로는 생각보다 큰 레스토랑이 있다. 약 180석이라고 하니 작지 않다.

 

미술관 1,2층 부분은 낮은 천장으로 되어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네덜란드 황금기의 대표작들 외의 것들이 가득하다. 고대 유물부터 중세 종교화, 다른 문화권의 그림들, 가구, 네덜란드 특유의 푸른 빛 도자기, 갑옷 등이 있다. 그래서 바로 가장 윗층, 사진처럼 높은 층고의 2층으로 향한다. 참고로 유럽은 1층이 우리가 아는 1층이 아니다. 무조건 지상에서 들어가는 층은 0층이다. 그래서 한국/미국식으로 따지면 3층인 셈이다. 아래에 이해를 돕기위한 미술관 맵을 올린다.

 

2층과 3층(반층)인 부분을 보면 연도로 확실히 어디가 집중해서 봐야하는 하이라이트인지 알 수 있다. 이 미술관 특성상 당연히 2층의 중앙부분이 바로 지금 먼저 사진으로 올리는 곳. 네덜란드 미술의 정수가 집합된 곳이다. 시간이 없다면 2,3층부분만 보고 1층은 더 빠르게 보아도 상관없다. 0층에서는 만약 초록색으로 표시된 기획전시관에 특별히 봐야할 것이 있으면 보고, 없으면 짧게 머무는 여행자에겐 더 시간을 할애하라고는 안 하겠다. 바로 옆에 반고흐미술관, 스테델릭, 또 암스테르담에는 렘브란트하우스, 안네프랑크 하우스, 영화박물관 The EYE, NEMO과학관, 등 너무 많아서이다. 

 

정말 건축물부터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천장만 10분을 바라보아도 좋더라. 양 옆으로 작은 그림들을 먼저 보면서 가장 끝에 보이는 "야경"으로 더 알려진 렘브란트의 <시민사수대의 순찰>을 보았지만 포스팅에서는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저렇게 정 가운데에 딱 걸어놓은 이 그림부터 설명한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대작인 렘브란트의 '야경'. 원래 제목은 <시민사수대의 순찰>, 캔버스에 유채, 379,5x453.5cm, 1942년

네덜란드는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스페인의 식민지배로 괴로워했다. 17세기에는 그것에 맞서 개별 자치국이 독립을 쟁취하고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민방위를 조직했다. 이것이 바로 시민사수대인데, 그 모습을 그린 '집단초상화'라는 독특한 회화 장르이다. 네덜란드는 이미 영국과 프랑스보다 먼저 해상활동으로 강대국으로 발돋움을 하며 스페인도 물리치고 굉장히 부유해지고 있었다. 17세기를 네덜란드 황금기 Dutch Golden Age라고 한다. 이후 계속 강성해져 지금의 뉴욕을 먼저 점거하여 뉴암스테르담으로 가지고 있었으나 대영제국의 힘에 무너졌다 (만약 안 무너졌다면 우린 네덜란드어를 배우느라 고생하고 있었을듯...)

 

어쨋든 이 작품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당시 부를 과시하기 위해 초상화와 정물화가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이런 집단초상에서는 프란츠 할스나 얀 스틴의 풍속화적 초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모든 인물이 다 동일하게 또렷하고 디테일이 있다. 그리고 다 비슷한 표정이기도 하다. 다 웃거나, 다 근엄하거나... 하지만 렘브란트는 그 관습을 깨고 하이라이트를 중앙에 딱 맞추었고 나머지는 흐릿하게 그려넣었다 (물론 이런 그림은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도 계속 그렸지만 당시 네덜란드 집단초상은 돈을 내고 그리는 일종의 기념사진인 것이기에 똑같이 대우를 해줘야했다.) 렘브란트는 36세인 시점에 이 사수대의 사령부를 장식할 그림을 의뢰받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규모가 매우 큰 것부터 일단 파격적이다. 적당히 큰 것도 아니고 아예 1:1 실제 사람 스케일로 그려넣었으니 힘이 꽤나 들었을 듯. 어쨋든 나중에 누군 흐리고 누군 좋은 조명 다 받았다 하며 돈을 주네마네 실랑이가 있었다고 한다^^ 

 

가운데 빨간 휘장을 감은 사람이 바로 코크 대장이고 그 옆으로 밝은 옷을 입은 사람은 사수대 부대장이다. 한가지 재밌는 것은 코크 대장 위쪽으로 렘브란트가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마치 이 멋진 그룹의 일원이 되며 이 그림이 자신이 그린 것임을 도장찍는 것 아닐까.

 

바르톨로메오 반 데 헬스트 Bartholomeus van der Helst, 뮌스터 조약 Banquet at the Crossbowmen’s Guild in Celebration of the Treaty of Münster, 232x 547cm, 캔버스에 유채, 1648년

 

위에 언급했던 '집단초상'의 예. 부유한 네덜란드의 삶을 보여주는 '기념사진'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모든 인물이 비슷한 '관심'을 받는다. 물론 위계질서가 있지만, 그렇다고 주변 인물의 채도를 확 낮추거나, 명암을 주지 않거나, 혹 흐리게 처리하진 않는다. 정물화 또한 동일한 이유로 여러 값비싼 음식, 가구, 장신구 등이 그려졌다. 위에 그림은 특히 스페인-네덜란드 전쟁에서 승리한 네덜란드의 기념사진이라고 보면 된다. 

 

옹기종기 앉아 그림감상 중인 3쌍의 부부.. 왜 앙증맞아 보이지 ㅎㅎㅎ 이렇게 부부가 함께 그림을 즐기며 다니는 것은 참 좋아보인다. 물론 내가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실상이 여기 사진처럼 좋진 않다는 것. 젊은 부부들이야 그런 심적여유가 있는 사람이 꽤 늘었지만 노부부가 함께 예술을 즐기는 모습을 많이 포착하지 못해서일까. 지구 곳곳의 미술관에서 사진을 정말 딱 5만장을 넘게 찍다보니 나름의 해석이 생긴 탓일까. 그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에 푸념한 번 했다.

 

 

초상화로 매우 유명한 프란츠 할스 Frans Hals의 <신혼부부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140x166.5cm, 1622년경.

 

그리고 당시 부유한 가정을 꾸리는 '부부초상'도 인기를 끌었다. 누구나 사업을 할 수 있고 언제나 성공 할 기회가 주어진 네덜란드에서 이렇게 부를 축적한 중산층 부부가 행복한 자신들을 그리기를 원했다. 현재도 우린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계속 사진으로 찍고, 또 영상으로 남기며 추억거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 당시엔 카메라가 없었으니 이렇게 그림을 남겨야하는데 화가에게 의뢰할 정도로 돈이 많으려면 왕족, 귀족만 가능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왠만한 시민들이 다 부자로 바뀌는 시대였기에 이렇게 '가정용' 그림이 많아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프랑스나 스페인의 귀족의 그림과 같은 맥락이 아닌, 많은 시민들, 가정이 그림을 의뢰한 것이다. 

 

작품에서 부부애에 관한 은유가 보인다. 포도나무와 담쟁이넝쿨은 가정에 충실한 현모양처를 의미한다. 부부의 표정도 긴장이 풀어져 보이며 (특히 남편), 부인은 이뻐보이려고 얼굴에 힘을 살짝 준 미소를 보여준다. 특이한 것이 뒤로 보이는 풍경은 네덜란드가 아닌 이탈리아다. 로마제국의 귀족들처럼 멋진 모습을 가지고 싶었을까. 네덜란드의 풍경보다는 풍요한 땅인 이탈리아 포도밭, 대리석 조각이 있는 정원을 꿈꾸었나 보다.

 

할스의 붓 컨트롤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초상의 분위기나 전달하는 메세지를 극대화 하기위해서는 세밀한 묘사로만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한 인물의 부분 부분을 다른 붓터치로 처리한다. 예를 들어 부부의 옷에 달린 레이스는 정말 머리카락 한 올로 칠한 듯한 세밀함이 돋보이는 반면 얼굴은 생각보다 많이 뭉개진 붓터치이다. 그래서 얼굴이 오히려 생기있어 보이는 효과를 갖는데, 마치 요즘 포토샵으로 얼굴 밝고 살짝 뽀샤시하게 처리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서도 자기몸에 걸친 장신구는 또렷하며 더욱 비싼 디테일이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국립미술관에서 만난 할스의 대표작 중에 <즐거운 음주가>도 있었다.

 

프란츠 할스, 즐거운 음주가 The Merry Drinker, oil on canvas, 81x66.5cm 1628~30

나에게 술을 건네며 재밌는 이야기를 해줄 것 같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아저씨 ㅎㅎ 역시 옷의 장신구는 세밀하게 터치하였고 얼굴과 손은 거칠게, 또 술잔은 마치 흔들리듯이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정말 술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효과를 주게된다.

 

그리고 남성중심의 사회만을 표현하는 것을 벗어나 가정을 꾸리는 여성들의 삶을 잘 표현한 시점이 바로 이 네덜란드 황금기 (17세기)다. 이전의 회화에서는 여성을 그린다면 마치 여신처럼 멋진 모습을 표현하거나 어떤 남성의 부속물로만 그려졌는데, 네덜란드 화가들은 일상을 만들어나가는 여성의 삶을 면밀히 관찰하였다. 그래서 당시 가정의 배경을 왜곡없이 기록해냈다고도 할 수 있다. 또 사진에서 보듯이 사이즈 또한 들고 다니기 쉬운 사이즈이다. 장엄한 여신상이 아니라, 스케치북 속에 기록된 삶을 개인의 공간에 걸어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궁전, 교회, 성당 등 공공적 장소에서 보여줄 그림이 아니라 개개인들이 소유로서 있는 그림이란 뜻이다. 그래서 마치 이 작은 그림들을 보면 내가 네덜란드 사람이 되어 당시 삶을 확대경으로 면밀히 바라보며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공간이 더 이상 미술관이 아닌 것 처럼.

 

이런 장르를 도시 풍속화.라고 하기도 한다. 일상을 정말 정확히 표현해서일까. 중세부터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시대 그림은 서민의 삶과는 전혀 다른 웅장한 대서사시만 집중해왔다. 혹은 너무 상류계층만 접하거나 그려진 것이다. 하지만 이 네덜란드 풍속화를 기점으로 어떻게보면 조금은 더 평등하게 주어진 시민들의 삶을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하인과 주인이 표현되었지만, 이는 사업으로 성공하여 주인이 된 사람이지 프랑스나 스페인의 왕족처럼 원래 신분이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그림이 더 현실적으로 와 닿더라..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 우유따르는 여인, oil on canvas, 45.5 x 41cm, 1660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 Mauritshuis에 있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와 함께 가장 많이 알려진 베르메르의 그림일 것이다. 이 작은 그림은 그의 다른 풍속화와 함께 있는데, 작아서 실은 복도 한가운에 서있으면 인파때문에 보이지도 않는다. 마치 루브르의 모나리자가 너무 작아서 제데로 볼 수 없는 것처럼.

처음 갔을때는 찍을 수도 없었다. 실은 가까이 정면에서 못 보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 살다보니 10번 이상 이 여인 앞에 서서 저 창으로 스며드는 빛을 느끼고, 집안일로 인해 투박하고 굵어진 팔뚝, 깊은 울트라마린의 옷, 뒤로 보이는 당시 주방의 벽, wall base로 깔린 타일, 등을 하나하나 보았다. 마치 문틈으로 훔쳐보는 느낌이랄까. 지속적인 관음의 형식을 취하는 어찌보면 코르뷔제가 맞는 말을 한 것 같다. 어떻게 되었든 여성의 공간은 항상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되어있었다. 그 반대로는 잘 없었다. 그런 기묘한 성의 정치를 생각하며 베르메르가 그린 풍속화를 감상했다.

 

연애편지 The Love Letter, 44x38.5cm, 1969-70

 

여주인과 하녀의 일상을 잘 보여준다. 그 당시 성공한 중산층의 집 인테리어를 잘 살펴볼수 있다. 마치 상징처럼 되어버린 저 블랙앤화이트 체크무늬 타일과 fireplace의 고전양식, 악보, 빨래통, 이탈리아 어딘가에서 온듯한 커튼 등.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남성의 시점에서 두 여인의 공간, 대화를 엿보는 것 같다. 빛이 없는 관람자의 공간에서 그 너머로 빛이 왼쪽에서 들이치는 여인의 공간. 문지방에 두껍게 매달려있는 커튼은 마치 힘으로 들추어내어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이다. 이를 입증하는 것은 하녀의 머리 뒤로 걸려있는 그림이다. 보통 사랑에 대한 주제를 그릴 때 바다를 항해하는 그림이 배경에 나타난다. 이 연애편지는 사랑을 고백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별을 고하는 것일까. 의문 들게만든다.

 

 

또 다른 풍속화, 여인의 공간을 잘 표현한 작가 피에트르 데 호흐 Pieter de Hooch의 <어머니의 의무>. Mother's Duty인데 머리의 이를 잡고 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품에 폭 안겨서 머리를 맡겼다. 당시 아무래도 유럽의 풍속으론 씻는 행위가 금지되어왔다. 씻는 것은 태어날 때, 결혼할 때, 그리고 죽을 때 하는 것으로만 여겼다. (지금 관점으로 보자면 동양의 위생이 훨씬 발전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어쨋든 유럽인은 근대시기까지 온 몸에 이나 벼룩처럼 작은 벌레들을 달고 살았다. 어머니의 의무는 바로 아이를 위해 정기적으로 이를 머리에서 제거해주는 것이 포함되었음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와 벼룩 등 위생에 관련한 이야기는 건축역사도 그렇고 많은 분야를 통해 계속 확인하였으므로... 더 언급은 하지 않겠다. 이 그림은 나에게는 어떤 이데올로기때문에 온갖 희한한 병이 생기고 이상한 방향으로 사람이 살 수도 있음, 그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물론 어머니의 헌신은 당연한 것이고.

 

렘브란트, 수도복을 입은 티투스, oil on canvas, 79.5 x 67.5cm, 1660.

티투스는 렘브란트의 첫 아내 사스키아가 낳은 아들이다. 티투스는 위로 3명의 형,누나들이 있었는데 태어나고 얼마 못가서 죽었다. 유일하게 살아서 성장한 티투스를 렘브란트는 더욱 사랑했는데, 슬프게도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그린 1660년경에 파산한 상태였다. 그래서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렇게 그림을 그려주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들의 모습이 마치 세상 고난 온몸으로 받아내는 수도승같이 표현되었다. 처음에 이 그림을 보고 어떤 수도승인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그 뒷 배경을 알고 다시 여러번 보았더니 저 표정에서 망연자실함, 세상의 덧없음이 느껴진다.

 

의학자, 물리학자, 사업가, 천문학자, 법률가, 은행가 등 네덜란드 황금기를 이끌었던 엘리트 집단의 초상은 널리고 널려있다. 계속 보아도 계속 새로운 그림들이 줄지어 있으니 시간을 두고 방문할 것.

 

그리고 도시 전경과 건축양식을 잡아내는 '도시풍경화'도 17세기에 붐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엠마누엘 드 빗 Emanuel de Witte가 있다. 이 작가는 나중에 다른 미술관 소개에 올리도록 하겠다.

 

국립미술관의 도서관. 네덜란드 미술관련 서적이 가장 많은 곳이다. 멍하게 보고있자니 이 분위기는 마치 해리포터가 갑자기 튀어나올 것 같다...

 

0층과 1층의 절반부분을 빠르게 훓어보자. 수차례 방문하며 계속 보았지만 아주 흥미가 있지는 않았어서 이 글에도 짧게만 소개한다. 실은 덜 유명한 그림이라 딱히 설명을 찾으려해도 나오지가 않았다. 미술관 도록을 보아도 그냥 짧게만 이게 뭐다. 라고만 나오지 더 자세한 설명없음;;

 

 

그래도 중세화는 스르륵 보면서 계속 익히면 좋더라.

 

그리고 찬란했던 네덜란드 황금기 시대의 도자기들. 실은 이 도자기는 일본과 중국에서 많이 배워가며 유입된 것인데, 특히 일본에서 배운 것은 실은 한국 도공들의 실력이다. 궁금하시면 일본이 왜 임진왜란도자기 전쟁이라고 했는지 찾아보시라. 한민족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로 있었는지, 그래서 또 다시 슬프게 만들고 한국이 더 넓은 정보력을 가지고 강해져야한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냥 흔한 미술관 전경. 2층에 비하면 여기엔 아무도 없다. 거의 항상... 그래서 가끔 위에서 대작들 보다가 시끄러워서 혼자 있고 싶으면 이렇게 미술관에서 덜 유명한 곳으로 와버린다. 오히려 그러면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안 유명한 것에서도 충분한 감동을 받고 생각히 확장될 수 있다.

 

다시 중정으로 돌아가려는데 이 건물 레노베이션에서 스터디했던 각종 건축 창호 종류와 전시된 작품에서 도출한 색으로 어떻게 배합하며 지금의 미술관을 만들었는지 보여준다. 와... 전시된 미술품의 색을 뽑아내서 그것으로 건물의 색을 어떻게 해낼지 하다니. 이건 나에겐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마치 음식을 먹으면 그것이 내 몸의 일부가 되는 것과 같다. 누군가 맘대로 지어버린 건물에 그냥 피상적인 인테리어로 치장해서 사는 우리의 일상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내부에서부터 모든 것은 나온다. 

 

이건 보너스 샷. 일년 넘게 있다보니 당연히 4계절을 다 맞이한다. 겨울엔 미술관 앞 호수가 얼어서 스케이트 장으로 변신! 뒤로는 도개교를 본딴 설치물을 만들어 두었다. 저기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어본다.

 

그럼 이렇게 보인다. 참 생각 잘했다 .뛰노는 아이들을 내려보며 뒤로는 I amsterdam 조형과 그리고 렘브란트 현수막이 걸린 국립미술관을 한 번에 담아내기. 왼쪽 천막에서는 따뜻한 코코아도 팔고 있다. 실은 나는 너무추워서 사진만 찍고 빨리 내려왔다. 아무래도 북구의 바람은 매섭게 차다.

 

그리고 국립 미술관에서 걸어서 5~10분이면 하이네켄 공장이 있다. 여긴 보여주는 마케팅용 공장으로만 쓰인다. 들어가면 각종 체험이 가능. 그리고 끝에는 시원한 맥주를 제공해준다. 티켓 가격은 성인 18유로, 미성년 14유로라 꽤나 비싼편인데 맥주값이 포함되어있으니 괜찮다. 딱 한 번은 해볼만함. 실은 회사에서 매주 하이네켄을 몇 박스씩 쌓아서 주니까 돈내고 맥주먹을 일이 별로 없었다 ㅎㅎㅎ

 

국립미술관 옆의 하이네켄, 그리고 그 옆 도보 5분거리, 같은 길에 있는 나의 전 직장 UNStudio. 압구정 갤러리아, 천안 갤러리아, 서울 한화 사옥 등 한국에도 여러 작업을 했다. 왠지 그립네...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을 올리며 이번 포스팅을 마무리한다. 저녁에 아직 완전 어둡기 전에 길거리 불이 들어오는 운하의 풍경은 정말이지 아침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국립 미술관 근처에서 배회하다가 "네덜란드식" 식사를 해보기로 했다. 딱히 그런게 있어? 라고 하겠지만 분명 있긴하다.. ㅎㅎ 한식, 중식, 프랑스식, 스페인식 등 확고한 입지를 다진 식문화는 아니지만 나름 소소하게 잘 되어있다. 웰빙이다 일단! 

 

Pantry. 국립미술관 바로 북쪽으로 운하 하나 건너서 4~5분 거리에 있다. 네덜란드 음식으로 유명.

 

이렇게 생겼다. 실은 이건 냉동식품으로도 팔아서 회사에서 점심으로도 자주 먹었는데 매쉬드 포테이토를 다양한 맛으로 표현한 3가지 scoop. 소세지 그리고 아주 연한 소고기 그레이비 소스. 독일과 영국의 중간단계라고나 할까. 언어도 영어와 독일어 반반 섞으면 네덜란드어가 된다고 하는데 ㅎㅎ 음식도. 간이 세지 않은 음식을 주로 먹는 나는 실제로 집에서 매일 요리를 하지만 소금 후추도 정말 아주 가끔만 넣고 왠만한 소스를 음식이 넣지 않는다. 이 미끄덩거리는 감자 덩어리의 부드럽지만 밋밋한 맛을 즐기는 것처럼 내 입맛도 아마 21년간 북미에서도 웰빙이랍시고 아무 양념없이 먹었던 고등학교 급식부터 지금까지의 생활때문에 굳어진 것 같다.

 

오늘은 이제 다시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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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네덜란드의 대표 화가가 살아숨쉬는 반고흐미술관 포스팅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본문의 모든 글과 사진은 직접 느낀점을 쓰고 촬영한 것인 지적재산입니다.^^ 블로그의 내용은 요약본이고 차후에 각 토픽마다 더 자세한 글과 사진들은 매체에 기고하거나 손스케치와 함께 책으로 엮을 예정입니다. 방문하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공감과 댓글은 힘이 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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