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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Architecture/건축가 Architect

[Architect] 프랭크 게리 Frank O. Gehry (1/3) - 스타건축가의 탄생

Brett D.H. Lee 2021. 2. 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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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계의 노벨상, 프리츠커상 수상자 Pritzker Architectural Award Laureates 시리즈 11번째.

 

** 줄이고 줄였지만 그래도 양이 방대하여 3편으로 나누었습니다. 이 첫 번째는 그의 배경 설명이 있어서 조금 글이 더 많습니다. 혹시 대표작 건물만 보시려면 중간쯤부터 시작하시면 되지만, 3~4분 할애하셔서 배경을 훑어보시는 것이 도움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 2, 3편에는 앞 뒤 긴말없이 바로 대표작을 나열하며 설명합니다.**

 

제11대 수상자는 아마 일반인에게도 가장 많이 알려진 스타 건축가 중 하나인 프랭크 게리 (1929~)이다. 번쩍이는 티타늄 건물이 물결치듯 혹 종이 구겨진듯한 빌바오 구겐하임 Guggenheim Bilbao, 로스앤젤레스의 월트디즈니콘서트홀 Walt Disney Concert Hall, 시카고의 밀레니엄파크 Millennium Park 그리고 서울 청담동에 2019년 오픈한 마구 요동치는 유리 파사드 facade의 루이비통 Louis Vuitton 건물 등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건축가 게리는 잘 몰라도 "아! 그 건물!"하고 바로 알아챌 것이다. 그 외에도 웬만한 도시마다 그의 시그니처 건물을 하도 많이 지어서 비건축가에게 쉽게 각인되는데 일단 형태적으로 재미가 있기때문일 것이다. 필자도 지금 다시 이 프리츠커상 수상자의 모든 건축가를 동시에 비교해보니 게리만큼 각종 상과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건축가가 없다. 미술계로 치면 앤디 워홀 Andy Warhol 같다고나 할까. 심슨에서 <프랭크 게리>편을 만들정도면 그의 영향력이 장난아님(?)을 입증하지 않는가.

 

필자는 건축가라서 더욱 보는 내내 웃겨서 쓰러질 뻔한 '심슨- 프랭크 게리' 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를 설계한 자하 하다드 Zaha Hadid 또한 같은 이유로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비건축가에게도 유명한 스타이다. 자하는 2004년에 이 상을 받기 때문에 약 6주 후에 포스팅을 올리겠는데, 이미 세상에 없는 그녀가 그립다.  그녀의 회사 파트너 패트릭 슈마허에게 크리틱을 받았었고 그녀가 마이애미에서 사망한 2016년 봄에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나에겐 더욱 각별하고 슬픈 소식이었다. )

 

1989년 11대 프리츠커상 수상자 프랭크 게리

너무나 유명한 건물을 창조해냈고 건축사에 아주 굵은 획을 그은 게리에 대해 이제 알아보겠다. 너무 많은 대표작들은 이 간단소개 포스팅에 다 올릴 양이 아니라서 지루하지 않도록 차후에 건물 몇 개씩만 테마를 이루어 나의 여행기 속에, 혹 <알아두면 쓸모있을 법한 건축물 >로 찾아올 예정이다. ^^

 

 

-----------------------------   프랭크 게리, 스타건축가의 탄생   ----------------------------

프랭크 게리는 1929년 2월 28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폴란드계와 러시아 유대인 집안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릴 적 할머니와 함께 여러 블록을 가지고 Sim City하듯이 작은 도시를 지어보는 것을 즐겨했는데, 할머니는 그의 창의력에 반하여 이를 격려하였다. 할아버지의 철물점에서 버리려고 내놓은 온갖 철기류, 나무토막, 가죽, 플라스틱 덩어리 등은 게리에게 아주 소중한 장난감들이 되었다. 그가 골판지, 각종 철판, 철조망, 합판, 거친 나무토막 등을 건축가로서 초기작에 많이 사용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어머니와 주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고 또 "So the creative genes were there" (창조적인 유전자는 거기에 있구나)라며 그를 항상 칭찬하였다. 아버지는 몽상가적 생각이라고 치부하였지만 어머니의 끈질긴 권유와 도움으로 그는 계속 그림을 유년시절에 그렸다.

 

유년기의 프랭크 게리 (실은 항상 스타건축가가 되고 한창 바쁘던 50~60세의 사진만 봐서 이것이 상당히 낯설다)

1947년, 게라가 16살이되는 해에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하여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였다. 게리는 트럭 배달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로스앤젤레스 시립대를 다니다가 USC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로 편입하여 건축학사를 수료했다. 게리는 이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저는 LA에서 트럭 운전사였고 딱히 그렇다 할 것이 없는 LA 시립대에 다녔습니다. 라디오 방송도 시도해보고 화학공학도 해보았습니다. 이리저리 방황을 하다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건가?' 하며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어요. 무엇이 나를 흥분시키는가... 저는 미술을 기억했습니다. 저는 박물관 가는 것을 좋아하고 음악과 미술감상을 많이 해왔습니다. 그런 것들은 저를 주로 음악당과 박물관에 데려간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했던 블록놀이를 떠올렸고 직감적으로 건축 수업을 몇 개 들었습니다" 역시 자신이 가슴 깊이 좋아하는 것을 계속 스스로 묻고 다가가야 성공에 미치는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미국 육군에서 복무도 하고 다른 직업을 거쳐가며 건축을 떠나 오랜시간을 보냈다. 1956년 가을, 그는 보스턴으로 거처를 옮기며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 GSD에서 도시계획 Urban Design and Planning 석사과정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는 이를 끝내지 못했는데 이유가 다소 희한했다. 사회적 책임과 건축에 대한 게리의 좌파적 생각은 당시 교수와 갈등을 빚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주변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고 한다. 어쨌든 학교와의 마찰이 분명 있었고 그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학위를 포기한 것이다.

 

토론중인 게리

그는 그 후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Victor Gruen Associates 설계사무소에서 근무하며 USC건축학교 견습생으로도 있었다. 1957년 28세의 나이에 동창인 Greg Walsh와 함께 첫 주택설계 기회를 잡았다. 이 주택은 길 건너에 사는 이웃인 Charlie Sockler가 시공을 했다. (이래서 주변 사람을 잘 둬야 한다!) 어쨋든 이 주택은 이웃인 Malvin David씨의 부탁으로 진행되었는데 캘리포니아 이델와일드 Idhyllwild 지역에 '다비드 캐빈'이란 이름으로 지어졌다. 190평방미터인 이 산장은 당시 일본 나라Nara 시의 쇼소인 보물창고 Shosoin Treasure House에서 영감을 받았다. 외부에는 보가 튀어나와 있고 수직의 douglas fir 목재가 있고 표면처리 없이 투박한 느낌의 천장이 인상적이다. (이것은 첫 작품이라 소개는 했지만 뒤에 나올 그의 대표작과는 매우 다르다.)

 

데이비드 산장 // David Cabin, Idyllwild, CA 1957

당시 28세였던 게리의 처녀작. 아직 어린 청년이 첫 작품 완공하겠다고 낑낑댔을 것이 상상된다.
희한하게 외부로 쑥쑥 튀어나와있는 보beam 구조

1957년에 이 집을 완성하고 잠시 파리로 건너가 안드래 레몬데 Andre Lemondet 밑에서 사사했다. 1962년 로스앤젤레스로 복귀한 게리가 드디어 건축계의 획을 그은 그의 사무실을 열었다. 1967년 Frank Gehry & Associates로 그 규모가 커져갔고, 2001년 Gehry Partners라고 이름을 바꾸며 현재까지 이어진다. 그의 일대기만 너무 길어진 것 같아 이제 그의 오피스에서 만들어낸 재미난 대표작들을 몇 가지 소개한다. 실은 1989년에 프리츠커상을 수상했으나 신기하게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그의 대표작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1989년 이후에 지어졌다. 평소에 그의 작품을 신기하게만 보았던 필자를 포함한 수 많은 건축인들도 게리가 형태적 호불호를 떠나 당연히 프리츠커상은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지만, 그 모든 작품들이 죄다 1989년 이후라고 알게되니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적어도 빌바오 구겐하임이나 게리의 상징적 물고기 형태는 세상에 보여준 후에 프리츠커를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프리츠커 수상 기준이 "건축과 우리가 사는 built environment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고 또 앞으로도 더 좋은 건축을 만들어 낼 생존하는 건축가"인데 그래도 너무 초기작이 대중에게 무엇을 제대로 보여줬는지는 솔직히 의문이 든다. 일단 그래도 그의 '해체주의' 건축이 시작된 5가지를 소개한다.

 

게리의 집 Gehry Residence 1978, 산타 모니카 플레이스 Santa Monica Place 1980, 카브리요 해양 수족관 Cabrillo Marine Aquarium, San Pedro 1981, 캘리포니아 우주항공 박물관 California Aerospace Museum, LA 1984, 노튼하우스 Norton House 1984 이렇게 5가지이다.

 

** 일러두기: 해체주의란? **

해체주의 건축은 기존의 건축언어를 거부, 타파하여 새로운 정립을 시도한 개념이다. 건축의 순수성, 균형성, 완전성 등을 부정하고 각 건축물에 숨어있는 가능성을 찾아내어 구조적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레코르뷔제 Le Corbusier 를 시작으로 모더니즘 합리적 기능주의를 공격하고 기존의 건축 기본 개념인 용도/기능 utility, 구조 stability와 이데아적/인간중심적에서만의 미 aesthetics를 해체하는 것이다. 고로 비정형적 추상원리에 의거하여 조화성, 통일성 등이 시각적으로는 사라졌지만 오로지 "형태"만을 해체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 안에 담기는 각종 프로그램 공간, 재료, 구조 등의 중심성, 통일성, 리듬, 위계질서 등이 모두 재해석되는 것이다. 그래서 해체주의를 대표하는 프랭크 게리나 자하 하디드의 건물들이 마치 외계인이 지어놓은 듯한 형상을 갖기에 우선 시각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우리에겐 다소 난해하거나 두려울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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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모니카에 위치한 게리의 집 // Gehry Residence, Santa Monica 1978

게리 레지던스는 그가 실제로 거주하는 곳이다. 원래는 네덜란드 식민지풍의 주택가에 지어졌고, 게리가 그 중 하나를 증축하여 완성된 것이다. 1977년 부인, 베르타 게리와 함께 1920년부터 있었던 이 주택을 구입했다. 당시엔 아주 작은 핑크색 방갈로 bungalow (캘리포니아 해변에 별장으로 많았던/많은 단층주택) 였을 뿐이다. 게리는 이미 이 집에 재료로 있던 금속, 합판, 철 울타리, 목재 골조 등을 극대화하여 이용하려 했고, 1978년 그는 낡은 외관을 그대로 두고 집 바깥에 새로운 공간을 덧대어 확장하기로 한다. 그는 주택의 2면은 거의 두고 나머지 절반에 기울어진 유리 정육면체를 끼워 넣었고, 체인링크 울타리 chain-link fences 및 파형강판 corrugated steel을 사용하여 주거지가 마치 해체중인 것처럼 보인다. 해체주의 작업을 하던 초창기의 작업의 연장선이냐고 묻는 인터뷰가 많은데 게리는 이 집은 해체주의와 관련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그러나 많은 평론가와 건축가들은 이것이 해체주의의 전형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반문을 항상 해왔다).

 

한적한 주택가에서 바로 눈에 띄는 게리의 집. 마치 삐죽삐죽한 광물들이 쾅쾅부딫히듯이 유리의 볼륨과 철판의 매싱들이 자리한다.

 

반대편에서 본 주택. 금방이라도 스르륵 내려오거나 하늘로 발사될 것같이 어지럽게 중첩되어 있는 지붕. 1층은 층고를 높게하고 유리로 전면 천창을 내어 남쪽에서 햇빛이 집으로 들어오게 하고, 2층은 corrugated steel로 하여 또 다른 느낌을 표현한다.

 

그가 그렇게 말하여도 이 집을 매일 봐야하는 주민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은 파격을 넘어 '파괴적'인 그의 집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현재도 그는 이곳에 거주중인데, 최근 Rustic Canyon을 바라보는 곳에 집을 새로 지어 옮기게 되지만 이 곳은 별장으로 계속 두려고 한다. 

 

난리난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는 특이한 위치와 모양의 창호 빼고는 평범해 보인다. 건축적 실험을 한다고해서 사람이 들어갈 공간을 다 파괴한다는 것은 아니다. 요즘들어 학구적인 실험외에 실제 실무에서도 학생들의 작업을 보면 사람이 들어갔을 때 거의 사용불가능한 공간을 실험이란 명목하에 하는 경우를 자주보게 된다. 형태에 치중하면 그 목적을 잃는다. 모든 건축적 실험은 물론 진정한 해체주의는 형태formal language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산타 모니카 플레이스 Santa Monica Place 1980

산타모니카 플레이스는 캘리포니아 주 산타모니카에 있는 야외 명품 쇼핑단지이다. 이 곳은 해변과 산타 모니카 부두에서 두 블록 떨어진 산타 모니카의 3번가 산책로 상업지구 남쪽 끝에 위치해 있다. 3층으로 이루어진 이 곳은 노드스트롬, 블루밍데일(2021년 4월 폐점), 아크라이트 시네마, 티파니, 루이비통, 버버리, 엠포리오 아르마니, 다이앤 폰 퓌르스텐베르크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1980년대이니 아직 유명하지 않던 게리가 이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니. 어린 시절의 담대한 해체주의 실험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쉽게도 2008년 1월부터 3년간의 대규모 재건축 과정을 거쳐 2010년 8월 6일 매끄러운 현대식 아웃도어 쇼핑몰로 재개장하여 게리가 만들어낸 둔탁하지만 매력적인 원래의 모습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

 

 

당시 중서부에서 건축, 미술과 텍스트의 관련성 연구를 했던 벤츄리, 에드러샤 등을 포함한 건축가와 미술작가들도 이 파사드를 한 번쯤은 언급하였다. 건물 자체가 곧 우리에게 텍스트, 기호적 언어로 다가오며 도시에서의 건축의 역할, 후기구조주의에 의거한 우리의 언어에 대한 고찰 등을 잘 대변하는 것이다.

몰mall의 입구. 지금이야 2021년이니 특이해 보이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꽤나 파격적인 형태였다. 일단 입구의 축이 애매하게 틀어져있고 (5도 정도) 미완성에다 끝이 잘려나간 듯한 캐노피, 각기 다른 모티브가 마구 충돌하는 입면이 처음에 보면 너무 난잡하여 정신이 없을 정도이다. 원래 이 곳은 지붕을 얹어 거의 대부분 실내로 꾸미려 했지만, 당시 게리는 '더 많은 야외공간이 필요하다. 지붕을 뜯고 내부의 '내장'을 파내고 공공 공간을 여러 출입구를 통해 더욱 오픈하여 이 지역의 유동성이 원활해져야한다'고 하며 이런 파격적 시도를 한 것이다. 덕분에 내부아닌 내부 공간은 아래 사진과 같이 되었다. 기억해야할 점은 이 것이 1980년대란 것이다. 층층히 쌓아올렸지만 모두 야외로 개방해버린 쇼핑단지,  가게와 거리의 구분선을 삭제한 것, 곡선과 직선이 충돌하며 입면과 동선, 볼륨을 만들어 내야하는 고난이도 작업은 이 이후에야 캘리포니아 전역을 휘감았다.

 

전형적인 캘리포니아 쇼핑몰의 모습이 된 게리의 산타모니카 플레이스

 

 

카브리요 해양 수족관 Cabrillo Marine Aquarium, San Pedro 1981

캘리포니아주 샌 페드로에 있는 수족관이다. 이 곳은 다양한 해양관련 교육 프로그램과 전시를 통한 해양학과 해양생물학의 과정을 보여준다. 1935년부터 운영 중이었는데 확장을 위하며 게리에게 의뢰하였고 1981년 10월 21일 당시 돈으로 3백만 달러 (약 30억원)의 건축비를 통해 아래와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입구 전경. 총 23,000 평방피트 (2,1000평방미터)인데 실내와 실외 전시 공간, 강당, 실험실 등이 체인링크chain-link로 둘러싸인 것이 특징이다. 노출된 각종 설비 (전기 및 배관)는 퐁피두센터의 개념처럼 건축의 "내장"인 부분을 밖으로 다 들춰내는 작업이다.

 

캘리포니아 우주항공 박물관 California Aerospace Museum, LA 1984

984년에 완공된 이 박물관은 항공과 항공우주 산업의 선두주자로서 캘리포니아의 역사를 기념하는 것이다. 설계 초기에는 원래 거대한 격납고 같은 공간으로 구성하였는데 게리는 1913년 원래있던 벽돌 무기고 남쪽 좁은 부지에 박물관의 부피와 전시 공간을 늘렸다. 입면을 종이접듯 접어버리며 각종 다양한 매싱들이 연결되며 내부 공간이 자연스레 확장되고, 빛이 다각도로 들어온다. 이런 공간과 빛 기발한 활용은 작은 면적을 최대한 활용하고 수많은 시야를 만들어야 하는 항공우주 디자인의 과제를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캘리포니아 항공우주박물관은 기하학적이고 뚜렷한 외형을 가진 '얼음 폭발'이라는 아이디어를 최초로 대규모로 실현한 것인데 가만보면 빙하를 반으로 딱 잘라놓은 형상이기도 하다. 건물의 동쪽은 직립형이며 직사각형이고, 서쪽은 각진 7면 다각형에 가로 금속 외피를 입혔다. 얼어붙은 폭발에 대한 생각을 강조하면서, 록히드 F-104 스타파이터 제트기가 남쪽 벽에서 위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이륙 중에 정지된 것처럼 매달았다. 마치 007 영화처럼 빙하위에서 무언가 폭발을 하는 와중에 간신히 이륙하는 모습을 포작한 사진이라고나 할까. 이 전투기는 캘리포니아 항공의 선두주자인 록히드Lockhead 에어크래프트 컴퍼니 (1926년 할리우드에서 설립)의 제품으로서 건물의 표지판 역할을 한다. (앞서 언급한 건물 = 텍스트/기호/이미지) 이 박물관을 기점으로 게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과 공공 프로젝트에 대한 의뢰를 받게되며 일약 스타로 발돋움한다.

 

 

노튼하우스 Norton House 1984 

게리는 1984년에 린 노튼과 그녀의 남편인 작가 윌리엄 노튼의 주택을 설계를 의뢰받았다. 작가의 집이라 그런지... 노튼가 게리는 각종 실험적 사유를 하며 이 주택을 완성한다. 보통 사람들은 주택을 살기 편하고 튀지 않게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건축주인 노튼의 생각이 매우 유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리는 자신의 집을 보여주고, 그 성격을 이 집에도 담게되었다. 1층 (푸른타일)과 뒤로 보이는 2,3층 부분 (에메랄드타일) 거의 일반적인 주택과 다름없는데,  2층 테라스에서 마치 성곽의 감시탑처럼 올라가는 자그마한 방이 재미나다. 이 것은 일상의 다양한 재료가 아상블라쥬assemblage되는 형식을 취하며 태평양 해안을 내려다본다. 어릴 적 나무 위에 아지트를 지어 자신의 '보물'을 숨겨놓는 어린아이처럼 이 곳에 앉아서 글을 쓰면 다양한 영감이 떠오를 법하다.

보다시피 이후에 소개할 어마무시한(!!) 대표작과는 다르게 조금 소소한 느낌이 없잔아 있지만 프리츠커상 심사위원은 "항상 실험에 개방적인 그는 피카소가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비판적 수용이나 그의 성공에 구속되는 것에 저항하는 확신과 성숙함을 가지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게리 스스로도 프리츠커상 수상 전의 완성된 건물 중에는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자신의 집, Gehry Residence를 꼽는다. 아무래도 1989년 이후 역사에 남을 대작이 연속적으로 지금까지도 나오고 있기 때문일듯 하다.

 

프리츠커 건축상 심사위원의 평

"Always open to experimentation, he has as well a sureness and maturity that resists, in the same way, that Picasso did, being bound either by critical acceptance or his successes. His buildings are juxtaposed collages of spaces and materials that make users appreciative of both the theatre and the back-stage, simultaneously revealed"

- Pritzker Architecture Award Jury comment -

 

1900년대부터 정말 어마무시한 작품들이 너무 많다. 형태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안에 들어간 각종 구조, 재료, 공간, 프로그램적 실험도 중요하다.

프리츠커상 수상 이후의 작품들 (여기부터는 대부분 독자는 물론 대중들도 몇 개는 알 것이다. 너무 길고 볼 것이 많아서 총 3개의 포스팅으로 나누었는데, 여기서는 세상을 뒤바꾼 건축으로도 유명한 빌바오 구겐하임 이전까지의 작품 4개만 우선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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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라 디자인 박물관 (일부)  // Vitra Design Museum, Weil am Rhein 1989

1981년 화재로 인해 몽땅 불타버린 비트라 캠퍼스는 이후 자하 하디드, 안도 타다오, 헤르조그 드 뮤론, 알바로 시자 등 수 많은 스타건축가들의 작품 모음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으로 탈바꿈한 세계적인 명소이다. 이 비트라 캠퍼스의 중간쯤에 자리한 이 디자인 박물관을 게리가 설계하였다. 많은 가구 공장, 사무실, 전시실 및 갤러리의 집합체인 Weil-am-Hein마을의 비트라 캠퍼스에서도 이 Vitra Design Museum은 매우 돋보인다. 

게리의 캠퍼스 디자인에 참가는 1980년대 후반에 이루어졌다. 30년 동안 사업을 하면서, 비트라는 상당한 양의 의자와 다른 가정용 가구들을 축적해 왔다. 이 회사는 처음에 이 물건들을 공공 전시와 보관 시설을 모두 제공하는 단순한 헛간 같은 구조로 보관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디자인 과정 동안, 이 단순한 의무는 더 야심차게 성장했다. 개인 소장품을 위한 전시 공간으로 계획되었던 것이 Vitra Design Museum으로 진화한 것이다. Vitra Design Museum은 디자인의 연구, 보급 및 대중화에 전념하는 독립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1980년대 점점 세상에 '해체주의' 건축으로 이름을 알리던 게리의 소식을 접하고 이 '새로움', '진보성'을 키워드로 하여 게리의 건축물을 비트라캠퍼스에 편입시키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이렇게 (감사하게도) 게리의 또 다른 박물관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를 이제 문화시설 전문 건축가처럼 칭송하게 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독일의 건축가 귄터 파이퍼와 공동으로 디자인된 이 뮤지엄은 게리의 소규모 해체주의 프로젝트와 그가 더 잘 알려진 더 크고 세련된 미학 사이의 분명한 전환이다. 그것은 완전히 각이 진 것도 아니고 완전히 구부러진 것도 아니고 혼합된 것으로서, 볼륨이 구조물 전체에 걸쳐 얕은 각도로 교차한다. 흰색 석고로 마감된 경사진 곡선은 프랑스 국경 부근에 위치한 르 코르뷔지에의 노트르담 Notre Dame du Haut을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지붕과 일부 벽면을 덮는 아연 합금 도금은 니콜라스 그림쇼의 인근 공장 건물을 언급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연마된 금속으로 가려질 게리의 후작을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8,000 평방 피트 (743 평방 미터)의 전시 공간이 박물관치고는 비교적 소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Vitra 디자인 박물관은 세계 최고의 디자인 전문 기관 중 하나이다. 전시공간은 건물의 두 층을 차지하고 있으며, 일련의 전시관(두 층은 드라마틱한 나선형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으로 구성되어 있다.

 

 

El Peix, Barcelona Spain 1992

The Fish. 그야말로 물고기 건물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맞춰 해변가 산책로에 축조되었다. 높이 35m 길이 53의 금속 구조물로서 햇빛의 강도와 방향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색상을 가지게 된다. 지금도 가장 상징적인 그의 모티브는 이 '물고기' 형상이다. 왜 물고기인가? 

 

정확하게 설명이 되지 않은건지, 아니면 설명이 다양하게 너무 많아서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일단 학계에서 언급되는 바로는 첫째, 유태인의 상징 중 하나인 물고기 형태의 연장선이라는 것, 둘째 1970년대 이후 올덴버그와의 교류를 통해 구상적 오브제 도입의 가능성을 깨달았다는 점이 있다. (올덴버그와는 아예 쌍안경을 그대로 사이즈만 키워 건물로 만들었다. 올덴버그의 미술세계는 또 하나의 포스팅이 필요하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물고기 작품분석을 하자면 게리는 물고기 몸체의 유선형적 곡선 streamline과 비늘의 표층 scales structure구조에 주목하고 이것을 건축에 적용하였다. 1980~90년대 당시의 건축가들을 보면 점차 단순화, 추상화되어 매끈한 곡선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점차 대형화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하, 벤반버켈 등) 이러한 물고기 도입이 게리의 건축에 끼친 영향은 구상적 건축의 출발이 되었으며, 1990년대 후반 이후 건축계에 나타난 비정형 건축이나 생물형태적 건축의 토대가 된다.

 

아침 저녁으로는 금빛으로 물이 든다. 그리고 해가 지고 푸르스름 한 모습도 가지는 그야말로 빛의 표현을 받아내는 물고기이다.

바다로 뛰어들 것같은 El Peix. 왠지 이 각도의 모습은 마치 니모에서처럼 물고기가 말을 하면서 바다로 갈 것 같다. 

물고기 조각, 물고기 램프, 접시, 악세사리 등 물고기 형상으로 할 수 있는 오만가지 제품과 건축물의 모티브를 다 뽑아낸다.

3편에 악세사리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코르뷔제의 모더니즘에서도 주창한 유선형 streamline의 미와 그 기능성은 게리에게도 나타난다. 물고기는 바로 유체 역학적 fluid dynamics으로 가장 완벽한 모티브를 부여해준다. 흐르는 선과 리듬의 형태가 순간 굳어진 바로 그 때 새로운 건축적 공간이 나타나는 것이다. 마치 동양의 율려미학의 음악과 리듬이 곧 세상의 창조적 에너지임을 말해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간단한 나무 모형만 보아도 굉장히 빠르지만 유연함으로 인해 거부감없는 역동적 내외부 공간이 창출됨을 보게 된다. 이 형태는 2008년 캐나다 토론토의 온타리오 미술관 증축에 거의 1:1로 대입되는데 그 내부공간에서 느낀 황홀감은 잊을 수 없다. 물론 저 모형처럼 목재구조로 된 원통형 공간이고 유리로 되어있다. 온타리오 미술관은 다음 편에 다시 소개한다.

 

 

미니애폴리스 와이즈만 미술관 Weisman Art Museum, Minneapolis, MN. 1993

어찌보면 1997년에 나타난 빌바오 구겐하임의 전초전인 미술관이다. 형태적으로나 건물용도와 부지특성으로나 굉장히 닮은 면이 많다. (물론 그의 1990년대의 다른 모든 작품들과 비교하자면) 미네소타 대학교 캠퍼스 미시시피 강변에 위치하는 이 미술관은 빌바오처럼 티타늄titanium 패널이 감싸는 덩어리들이 마치 점토를 척척 붙이고 찌그러뜨린 마냥 자유로운 형상이다. 독특한 형상과 미술관이라는 문화공간 특성을 살려 개관과 동시에 미네소타 대학은 물론 미네소타 주의 주요 랜드마크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이 건물을 보러 오는 건축학도도 있으니 작은 '빌바오 효과'가 이미 나타난 것 아닐까. (빌바오 효과란 짧게 말하자면 한 랜드마크적 건축물을 세우면서 낙후되어가는 도시, 지역이 되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건물은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2개의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띈다. 남쪽과 동쪽에는 Northrop Mall의 역사적 랜드마크들과 어우러진 벽돌 파사드 facade이고 북쪽과 서쪽은 곡면과 날선 각이 있는 스테인리스 stainless steel 타일 파사드이다. 그리고 다른 미술관이나 음악당 건물의 입구에도 꼭 나타나는 폭포와 물고기 모티브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입구를 보면 파사드에 물고기와 폭포가 표현되어있다. 물고기는 위에 El Peix에서도 언급했듯 게리에겐 중요한 모티브이다. (실은 나중의 건물에서는 명확하게 보이는데, 이 미술관에서 필자는 어디가 물고기인지 찾지를 못했다...)

 

번쩍이는 스틸 파사드는 게리와 자주 협력하는 금속건축재료 전문업체 Zahner Company가 설치하였다. (이 회사는 각종 금속 디테일이나 파사드 타일을 아주 고품질로 뽑아내는 것으로 유명하여 필자도 몇 번 사용한 적이 있다.)

 

미술관 내부공간. 마구 충돌하는 건축 매싱들이 그 교집합, 충돌지점에 묘한 틈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마치 누가 한입 베어먹은 듯한 천창 skylight이나 갑자기 전시 공간으로 튀어나오는 트러스truss 구조물이 있다. 그리고 마침 미술관에도 프랭크 게리의 '물고기'작품이 하나 놓여있다.

 

 

Dancing House in Prague 1996

프라하의 춤추는 건물. 프라하의 명소 프라하 시계탑이 있는 광장과 카를교, 카프카 생가가 있는 황금소로 등을 보려면 주욱 동서방향으로 걷게 되는데, 그 길에서 한블록 아래에 위치하여 쉽게 볼 수 있다. 필자는 프라하에서 생각없이 카를교를 건너려다가 이 건물을 보고 까무러치게 놀랐다. 당시엔 게리가 이 건물을 했다는 것만 알았지 프라하에 있는건지도 몰랐다. 어쨋든 이 한쌍의 건물은 1996년에 지어질 당시 구시가지 건축에 대해 굉장히 보수적인 유럽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주변에는 온통 바로크, 고딕, 아르누보 건물이 한가득인데 갑자기 이런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건물이 들어섰으니 주민들이 화가 났을 법도 하다. 이에 반해,수십 년 동안 이 부지 바로 옆에 살았던 당시 체코 대통령 바클라프 하벨 Vaclav Havel은 이 건물이 문화 활동의 중심지가 되길 바라며 환영을 했다고 한다. 

 

게리는 원래 이 집을 당시 유명한 댄서였던 Fred Astaire와 Ginger Rogers의 이름을 따서 프레드와 진저 Fred andGinger라고 지었지만 현재는 잊혀져 사용되지 않는다. 원래 지어줬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녀 한쌍이 손을 잡고 (한 손은 허리를 잡고) 춤을 추는 것이 이렇게 건축물로 승화한 것이다. 당시 게리 또한 '미국 할리우드의 키치적인 것이 고풍적인 프라하에 섣불리 들어가는 것'을 걱정 했다고 한다.

(그럼 왜 처음부터 본인이 이렇게 설계한 것인지...) 

 

 여성의 드레스를 표현한 곡면 유리 파사드는 각기 다른 모양과 치수를 가진 커튼월 유닛 unitized system이고 옆의 남성, 프레드를 나타내는 건물 역시 다 다른 크기와 곡면의 석면타일로 되어 있다.  또한 창문은 마치 액자가 걸려있는 것처럼 표현하기 위해 돌출시켜 입체감을 주었다.

 

마치 여성의 드레스, 치마 폭으로 들어가는 듯한 입구. 위에 보이는 유리 모듈과 흰 엿가락처럼 흘러내리는 기둥 구조는 마치 나풀되는 드레스의 끝자락같다.

유리 파사드의 건물 상층부에는 이런 카페가 자리한다. 어디하나 직각없이 삐뚤빼뚤.

석면타일로 된 건물의 꼭대기 층에는 레스토랑이 자리한다. 상당한 벽의 두께에서 외부로 돌출하는 창호의 안쪽 디테일을 보면 옆면이 전부 거울처럼 반사율 높은 메탈로 polished metal 처리하여 마치 벽이 종잇장처럼 느껴지게 하였다. 창문이 V자로 연장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다소 유리파사드의 건물과는 다르게 창호가 작아 답답해보였을 이 공간도 마치 가벼운 텐트에서 부유하는 듯 하다. 모든 것은 디테일에 숨어있다는 미스Mies의 말이 여기에서 피부로 와닿는다. "God is in the details."

 

 

참고로 위에 언급한 모든 건축물은 필자의 세계여행기 및 20년의 해외생활 포스팅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과 느껴야 하는 포인트는 거기에서 필자의 original 사진으로 다시 올리도록 약속하겠다. 이제 그럼 과연 빌바오 구겐하임이 뭐길래, 뭐가 그리 대단하길래 '빌바오 효과'란 단어까지 나타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2편으로 옮겨가겠다.

Image sources: ArchDaily, Dezeen, Wikipedia, WikiCommons, Guggenheim,

Weisman Art Museum, Gehry Technologies, Architectural Record, and Simpsons.

 

 

**출처가 따로 있는 사진 외의 모든 글과 사진은 직접 느낀점을 쓰고 촬영한 것인 지적재산입니다.^^ 블로그의 내용은 요약본이고 차후에 각 토픽마다 더 자세한 글과 사진들은 매체에 기고하거나 손스케치와 함께 책으로 엮을 예정입니다. 방문하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공감과 댓글은 힘이 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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