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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tect] 오스카 니마이어 (니에예메르) Oscar Niemeyer - 브라질 건축

Brett D.H. Lee 2021. 1. 20.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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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커상 수상 건축가 시리즈를 계속해서 이어간다.

이번에는 브라질에서의 모더니즘 혼을 건축했다고 과언이 아닐 오스카 니마이어 (니에예메르) Oscar Niemeyer에 대해 알아보자. 참고로 그의 이름이 영어로는 '니마이어'로 발음되나 브라질의 언어는 포르투갈어로 한국에서 그 표기법이 2006년에 제정되며 현재는 '니에예메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내가 브라질 갔을 때 현지에서도 그냥 '니마이어'라고 부르던데... 필자는 영어 쓰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알아들을 발음 표기인 '니마이어'라고 쓰겠다.

 

 

1988년에는 미국의 건축가 고든 번샤프트 Gordon Bunshaft와 함께 공동수상하였다. 여러 명이 하나의 공동체(한 회사)로서 수상을 한 것은 2000년대 들어 4번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각자 활동하던 건축가 두 명에게 상을 준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2021년 아직까지는)

 

1907년 브라질의 대도시이자 남반구에서 가장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활발한 리오 데 자네이루 Rio de Janeiro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포르투갈에서 살던 독일계였고 이후 브라질로 이민하였다. 19세기의 남미는 지금과는 다르게 북미와 경제, 정치, 사회적 힘의 균형을 이루며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었기에 당시 수많은 유럽인이 특히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이민한 배경이 있다. 니마이어는 그저 평범한 카리오카로서 typical young Carioca (카리오카는 리오의 모든 것에 붙이는 명칭인데, 평범한 리오의 젊은이 정도로 해석)  유년시절은 특이한 점 없이 자유분방 bohemian하게 지내다가 21살 다소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21살까지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그가 책임감을 느끼고 1930년 국립예술대학 Escola de Belas Artes에 입학, 1934년에 졸업하였다.(그의 회상록을 보면 그 때 느낀 중압감을 알 수 있다.)

오스카 니마이어 (left)와 루치오 코스타 (right)

국립예술대학에서 니마이어의 건축 인생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 브라질 근대건축 운동의 아버지, 루치오 코스타 Lucio Costa에게 교육을 받고 또 그의 조수로 많은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특히 졸업 후 집안에서 운영하는 활판인쇄소 typography house에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물리치고, 월급은 못 준다는 코스타의 사무실로 가서 리오의 브라질 교육보건부 신축 설계 및 완공 (1936 - 1943) 일련의 프로세스에 참여한다. 당시 남미는 물론 아메리카 대륙 전반에 걸친 식민지 부흥 건축양식 Neocolonial Revival movement에 질려있던 건축가들은 유럽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모더니즘, 국제 양식 International Style에 열광했다. 코스타는 1936년에 이 교육보건부를 설계하면서 주정부에 반드시 르코르뷔제Le Corbusier를 자문으로 할 것을 요청했고, 니마이어는 특별히 그의 곁에서 설계 조수로 있도록 했다. 자연스레 그는 현대건축의 거장 코르뷔제의 모더니즘을 흡수하며 남미 특유의 조형언어와 융합하는 방식을 터득한다. 설계의 막바지에서 코르뷔제는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있었고, 니마이어가 나머지 도면 작업과 설계 수정을 하였는데 코스타는 니마이어의 작업에 놀라워하며 1939년부터 이 프로젝트의 총괄을 그에게 맡긴다. 유럽의 모더니즘과 지역적 언어의 융합이란 니마이어는 물론이고 현대까지 이어지는 비판적 지역주의 Critical Regionalism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다. 이는 따로 포스팅하겠다.

 

유럽 뿐 아니라 전세계의 근현대 건축의 뿌리를 통째로 뒤바꾸어 놓은 레코르뷔제 Le Corbusier

특히 코르뷔제는 남미의 건축가들에게 유럽의 학구적이고 진부한 양식에서 벗어나 지역적 요소를 사용할 것과 남미,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곡선, 곡면디테일을 살리는 것, 철근콘크리트 같은 현대적인 재료를 사용할 것 등 전방위적 개혁을 권고했다. 이것을 적극 수용한 첫 사례이자 니마이어의 초기작이 바로 이 브라질 교육보건부 건물이다. 당시 남미에서는 (실은 세계 어디서나도) 신재료였던 강화 콘크리트 reinforced concrete의 실용 가능성을 여기서 입증하며 니마이어는 물론 많은 남미의 건축가들의 작업에 적용된다. 즉 브라질 모더니즘 Brazilian Modernism의 시발점이 된다.

 

  브라질 교육보건부 1943, 레코르뷔제의 건축어휘가 스며들어 있다. 

브라질 교육보건부 건물은 주정부에서 지원하여 만들어진 모더니즘 고층빌딩 skyscraper의 첫 사례이다. 세계 어디에도 정부가 지원하여 코르뷔제나 미스가 주창한 국제양식의 고층빌딩이 아직은 지어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물론 사기업에서는 진행하는 예가 많았지만). 그런 면에서는 당시 브라질인의 새로운 것을 일단 해보는 진보적 사고인지 아니면 일단 모르니까 서구의 좋은 것을 따라해야한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브라질 건축발전에는 큰 도움이 된 듯하다. 

 

포르투갈의 전통 장식 아줄레주로 1층을 둘렀다. 

코르뷔제의 건축의 5대 요소가 들어가 있으면서 동시에 지역색을 드러낸다. 예를 들자면 포르투갈의 아줄레주 벽 장식과 이베리아 반도에서 넘어온 무어 양식 Moorish이 가미되어 변형된 차양 Brise-soleil, 국제양식에서는 쓰지 않았던 화려한 원색적 표면, 라틴아메리카식 조경 디자인, 그리고 이후 나타나는 라틴크로스 Latin Cross에서도 볼 수 있는 곡면 처리된 디테일들이 있다.

 

코르뷔제가 근대건축에 들어 처음 제안한 brise-soleil

1937년의 초기작품이 있지만 크게 관심은 받지 못하였는데, 니마이어는 스승 코스타를 통해 이렇게 중요한 건물을 완공하고 승승장구하며 각종 대형 프로젝트를 계속 이머나갔다. 곧 니마이어의 건축인생에서 가장 큰 프로젝트이자 지금의 그의 위치를 만들게 한  브라질리아 도시설계를 하게된다. 당시 브라질 대통령 주셀리노 쿠피스첵 Juscelino Kubitschek은 수도를 리오에서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이전하길 원했다. 마치 왜 그렇게 새로운 수도를 통째로 만들었는지 의문이 가끔 드는 캐나다의 오타와, 미국의 워싱턴 DC, 호주의 캔버라 등과 비슷하다. 주변에 분명 원래 수도이자 경제,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가 있음에도 수도를 따로 (작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특별한 권리를 부여받은 도시, fiat city 라고 한다. 

 

니마이어. 공사중인 브라질리아에서

쿠피스첵이 1956년 유력한 당선인으로 거론될 당시 니마이어를 만나서 그의 새로운 수도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2차세계대전 이전만 해도 북미와 남미의 정치, 경제, 사회적 힘의 차이가 벌어지진 않았는데 이후 미국은 너무나 강력해지는 반면 남미 대부분 나라들은 다방면으로 후퇴를 하고 있었는데, 이에 반응한 것인지, 마치 워싱턴 DC처럼 새로운 수도를 원하지 않았냐는 의견이 분분하다. 쿠비스첵은 브라질 남동쪽에 몰려있는 모든 권력을 브라질 중부로 옮겨 각 지역의 균형을 맞추고 영토를 전체적으로 사용하길 원했다. 곧 니마이어는 대통령의 뜻에 따라 브라질리아 현상설계를 개최하였고 그 당선자는 그의 스승이었던 코스타가 된다. 그리고 도시의 전체적 기획은 코스타가, 각각의 건물은 모두 니마이어가 총괄하게 되었다. 

 

코스타의 도시 설계안

브라질의 번영을 기원하듯 유럽에서 건너온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를 비행기나 잠자리의 날개처럼 표현하며  팔부분을 곡면으로 처리하였다. 차후에 그는 이를 라틴 십자가, Latin Cross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동서로 뻗은 세로축에는 업무지역이고 남북으로 휘어있는 날개부분은 주거지역이다. (호수가 동쪽, 90도 돌린 설계안) "50년 진보를 5년안에"라는 구호 아래 1956년 도시를 만들자고 언급한 지 4년도 채 안되는 1960년 4월에 이 모든 도시가 통째로 건설되며 리오에서 브라질리아로 천도가 되었다. 이 당시 국민들의 반발 또한 만만찮았는데 이유는 다소 강압적 건설노동과 국고를 다 소진해버린 것이다. 실제로 이후 브라질은 아주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브라질리아도 그다지 살고 싶지는 않은 도시로 인식되며 어찌보면 사회, 경제적으로는 성공적인 프로젝트는 아닌 것으로 사료된다. 이곳의 모든 주거지는 국유화되어 임대되고 일반 근로자와 고위공직자들이 섞여사는 획일적 이념을 담고 있으며, 오로지 도시의 미관과 상징성을 추구한 극도의 모더니즘의 결과로 실사용자인 사람이 배제된 것이 지적된다.  대통령의 강경한 시행에 의하여 훌륭한 건축적 실험을 하고 거기서 얻은 독특한 양식구축 및 각종 문화적 자원을 남긴 것은 맞지만 과연 이것이 옳은 정치와 건축의 결과인지는 의문이 든다. (물론 필자는 니마이어의 건축언어 자체만은 좋아하는 편이다.) 어찌됬든 이 브라질리아로 인하여 국가가 불안해지고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며 니마이어 인생에도 좋지 않은 결과를 낳게되는데 이 부분은 건축물을 다 소개한 후 마지막에 설명하겠다.

 

"전통 기능주의의 단계를 극복해나가는 브라질의 건축은 바야흐로 조형 표현 탐구에 돌입했다"

 

브라질리아에 세워진 그의 건물만 보아도 그가 어떤 건축을 해왔고 할 것인지 다 알게 된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니마이어식' 표현이 다 들어있다. 크고 작은 것들이 굉장히 많은데 가장 주요한 건물 3가지를 소개하겠다.

 

브라질리아의 상징인 브라질 의회건물 Brazilian National Congress
UFO가 내려앉은듯한 형상

어디선가 비슷한 것이 본 적이 있는가? 바로 뉴욕 맨하탄 미드타운 이스트에 있는 UN본부와 매우 유사하다 (비행접시같은 회의장빼고는). 1947년 유엔본부 설계공모에 그의 scheme 32가 당선되었고 코르뷔제 및 11명의 저명한 건축가들과 한 팀으로 진행하였다.  이 Scheme32가 오롯이 니마이어의 것인지 코르뷔제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출처를 아직 모른다. 당시 국제정치 역학관계가 분명 관여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어쨋든 1953년 니마이어는 UN본부 설계에도 참여하며 지속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자세히 보면  브라질리아의 직육면체 청사 한개만 빼면 유엔본부의 형식과 거의 똑같고,  아래에 수평으로 긴 포디엄부분은 곡면처리하여 니마이어의 시그니처를 보여준다. 유엔본부는 지금도 코르뷔제와 니마이어 각각의 언어가 잘 어우러진 작품으로 평가된다.

뉴욕의 유엔 본부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Metropolitan Cathedral로도 불리는 브라질리아 성당 Cathedral of Brasilia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도 종종 꼽히는 명작 중 하나이다. 그는 국가의 수도에 잘 어울리는 새로운 성당 건축언어를 구축함이 우선시 되었다. 서로지지하는 곡면 구조물과 각 뼈대의 사이를 메운 청색과 녹색 (브라질의 상징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기본적인 고딕양식의 buttressing과 빛의 표현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건축공간을 만들어 낸다. 1층 내부는 텅비워 굉장히 단순하면서 추상적인 공간을 보이는데 이로 인해 장엄함 sublime을 느낄 수 있다. 이 16개의 곡면은 생선이나 나무줄기의 가시로도 보이는데 정확히 그는 이 건물은 예수가 쓰고있던 가시면류관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였다. 굉장히 직설적이면서도 전통을 무시하지 않으며 새로운 건축기술과 언어의 실험을 성공적으로 하여 몇 평론가들은 적어도 이 건물만큼은 코르뷔제를 능가했다고 평가한다. (side note: 평양의 빙상관이 이 성당을 모방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다)

 

브라질리아 성당 Cathedral of Brasília
성당 내부
브라질 대통령의 집무소/공관. Palácio do Planalto
자체적으로도 표현을 하는 Palácio do Planalto의 기둥
밤에 바라본 대통령 집무소/공관

 

1951년부터 상파울루시 400주년 기념 박람회의 종합계획과 건축을 담당하며 이비라푸에라 공원 내 모든 건축물을 설계하고 총괄하게 된다. 각국의 건축가들과 협력한 것까지 다 포함한 리스트를 보면 실로 어마어마한 양인데 일단 그가 직접 설계한 대표적인 건축물 4가지만 소개하겠다. 

 

이비라푸에라Parque do Ibirapuera 공원 내 강당과 전시관

마치 비행접시가 착륙한 듯한 

 

"novo homem, Brasileiro e moderno" "새로운 인간, 브라질인, 그리고 현대성"

 

외부에서는 정말 이게 지구의 건물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외계인이 금방이라도 나올 듯한 자태.

그 내부는 더더욱 충격적이다. 실은 외부에서 보면 내부가 어떻게 생겼을지 종잡을 수 없는데 그것을 뛰어넘어 굉장히 새로운 공간경험을 선사한다. 어찌보면 코르뷔제의 건축적 산책을 마음껏 하는 것이랄까. 브라질리아 성당처럼 텅빈 원형 공간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분산시키는 경사면과 부유하는 슬라브가 놀랍다.

 

현재도 활발히 이용되고 있는 전시관

 

건너편에는 강연실Auditorium이 있다. 메롱하는 듯한 입구의 캐노피.

치즈조각 잘라놓은 듯이 아무 창호 없는 매싱에 입구 반대편으로는 이렇게 옆으로 확짝 다 개방이 가능한 문이 있다. 저 문을 활짝열면 내부의 무대가 공원 외부로 확장될 수 있다.

 

 

공원 내부에는 가까운 건물들의 2층을 연결하는 다리가 있고 종종 이렇게 지상을 몸을 비틀듯하며 계단을 내려준다.

 

이비라푸에라 공원안에 있는 상파울루 현대미술관 São Paulo Museum of Modern Art (MAM). 세계 3대 미술 비엔날레의 한 곳이 바로 여기 상파울루에서 열린다. (뉴욕의 휘트니비엔날레, 베니스 비엔날레, 그리고 이곳)

 

 

이렇게 한 도시 혹 공원 전체에 놓일 모든 건축물을 다 설계하고 완공한 대형 프로젝트를 잠시 뒤로하고 몇 가지 소형 단일 건물 프로젝트도 몇 가지 찾아보자. 일단 1943년에 앞서 언급한 교육보건부 건물과 동시에 완공된 성 프란시스교회 Church of Saint Francis of Assisi를 알아본다. 실은 이 공원 일대 또한 마스터플랜으로 댄스홀, 레스토랑, 컨츄리클럽, 호텔 등으로 구성된 Pampulha complex로 기획되었고 50년대에 브라질 대통령이 되었던 쿠비스첵이 애용하던 주말안식처로도 유명하다.다행히(?) 여기서는 모든 건물을 니마이어가 진행하지 않아서 교회 한가지만 보고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4개의 포물선parabola로 이루어진  Church of Saint Francis of Assisi

1943년에 이렇게 곡면을 전면에 내세운 건축물이 흔하진 않았는데 뉴욕 모마MoMA에서 1943 <Brazil Builds>전시에서 브라질 최초의 근대건축물로 소개되며 니마이어의 이름이 브라질을 넘어 세계적으로 도약한다. 한편 보수적인 대주교의 반대로 1958년까지 15년이란 세월동안 봉헌되지 못하고 그저 신기한 건축물로 자리했던 역사도 있다. 

 

역시 포르투갈의 문화의 일부라 할수 있는 푸른색 모자이크 타일, 아줄레주 Azulejo가 화려하게 벽을 장식한다.

교회 내부

지붕면 또한 푸른계통 모자이크로 처리하여 호수에서 솟아나온 4개의 포물선 물결이 더 작은 물결로 부서지는 시각적 효과를 가져온다.

 

리오 데 자네이루에서 버스나 보트를 타면 10~20분만에 도착할 수 있는 과나바라 만 건너편의 마을, 니테로이 Niteroi에 자리한 비행접시, 아니 니테로이 미술관이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에 잡아버리는 강력한 형태이다. 지금 50미터 규모의 3층짜리 원형 미술관은 중심 구조물에 의해 지면에서 16미터 띄워져 있으며 그 지면에는 수경공간을 조성해 놓았다. 물에 비친 부유하는 미술관은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외계비행물체를 저절로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입구까지 저 붏은 레드카펫 혹 혓바닥같은 경사로로 서서히 상승하며 시선이 상하좌우, 180도 돌기까지 하며 입장 전에 주변 경관과 미술관 건물의 대화를 몸소 느끼며 올라오도록 유도한다.

미술관 단면도

마지막으로 그의 특이한 이력으로는 그가 평생 공산주의자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당시 그는 젊은 이상주의자가 되며 1945년 브라질 공산당 PCB에 입당하여 세계의 공산화를 굳게 믿은 건축가이다. 아무래도 브라질의 정계에서도 광적인 공산주의자던 니마이어는 소련과 쿠바도 방문하였는데, 피델 카스트로 Fidel Castro는 "니마이어와 나는 세계에 남은 마지막 공산주의자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서 냉전이 사라진 이후 그에게 불이익이 많이 오기도 하였다. 1964년 브라질은 군부 정권이 지배 하에 점차 자본주의가 들어오고, '더 이상 공산주의자가 설계한 건물을 브라질 영토에 있게 할 수 없다"라는 말과 함께 니마이어는 수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1946년 예일대 교수직을 받았으나 미정부로부터 비자발급을 거부당하여 미국에서 가르치는 일은 불가했다. 훌륭한 건축인이라는 것과 정치적 성향이 별개의 문제라고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건축은 사회의 모습을 담는 것이기에 정부차원에서 그를 막은 것도 이해는 된다. 니마이어는 자신의 사무실마저 압수수색하는 정권을 피해 1965년 프랑스로 건너가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건축가로 업을 이어갔고, 1985년 브라질 군부독재가 종료되며 그는 다시 조국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다행히 이후에는 조용히 건축활동을 이어가며 1988년 제 10대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지목되며 다시 한 번 세계의 그의 이름과 훌륭한 건축물을 알리게 된다. 

 

그가 유럽에 남긴 몇 가지 작품을 살펴본다.

이탈리아에 있는 오스카 니마이어 강당. Oscar Niemeyer Auditorium, Ravello, Italy
강당 단면도

 

오스카 니마이어 국제문화센터, 스페인.  Oscar Niemeyer International Cultural Centre, Asturias, Spain
오스카 니마이어 박물관/기념관, 브라질 / Oscar Niemeyer Museum Curitiba, Brazil
인공섬으로 지어져 전시공간으로 이용되는 Casa do Baile

 

마지막으로 니마이어 그가 살던 주택, Nimeyer House이다. 중간에 놓여있는 바위를 그대로 품은 상태로 수영장과 집의 구조를 이어간다. 

니마이어. 자신의 집에서 부인과 함께.

 

 

"건축은 그것이 행해지는 장소와 관련을 가져야 하며, 그 지역의 아름다운 것을 보존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건축이다"

 

 

예전에 했던 작품들을 스케치하며 학생들과 후배건축가들을 가르치는 니마이어

 

꽤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2012년 104세의 나이로 타계하기 전까지도 설계에 매진할 정도로 정치사회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건축에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나는 브라질의 대표 건축가이다.

 

104세의 나이까지 건축혼을 불태운 오스카 니마이어.

Image Sources 이미치 출처: Wikipedia, Wikicommons, Archdaily, City of Brasilia, Ibierapueira Park Conservation

 

다음 포스팅에서는 그와 함께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미국의 고든 번샤프트 Gordon Bunshaft에 대해 알아본다.

**출처가 따로 있는 사진 외의 모든 글과 사진은 직접 느낀점을 쓰고 촬영한 것인 지적재산입니다.^^ 블로그의 내용은 요약본이고 차후에 각 토픽마다 더 자세한 글과 사진들은 매체에 기고하거나 손스케치와 함께 책으로 엮을 예정입니다. 방문하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공감과 댓글은 힘이 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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